< Carving the Path >
Lee Sangbae (이상배)
5 - 21 Dcember 2024
Words by Seo Jae Woo (서재우)
Photography by YB Kim
조각가 이상배는 자신의 흔적을 나무에 새긴다. 그에게 조각은 우연한 거리에서 마주한 기분 좋은 산들바람, 방랑객의 삶을 살던 시절의 애환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형태에 가깝다. “저는 예전부터 상징적인 부호로 일기를 쓰곤 했어요. 일기장을 펼치면 글이 아니라 도형이나 선, 축약된 어떤 형태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죠.” 이상배는 자신의 작업은 창작가로서 새로운 영감을 통해 만들어 낸 형태이기보다는 어린 시절 일기장처럼 자신이 살아온 순간에 기록하고 싶은, 무의식에서 도출한 이미지들이다. “사실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왜 이 형태의 조각을 빚었느냐고 물으면 사실 할 말이 없거든요. 그냥 나무를 깎았는데 자연스레 이런 형태가 되어 나왔어요. 그래서 한동안 고민을 했어요. 작가로서 작업하는 이유 정도는 설명할 줄 알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제 작업의 모든 것이 과거 십 대 시절 그렸던 그림과 조각, 알 수 없는 문자로 가득 채워진 일기장에 전부 담겨 있더라고요.”
이상배의 작업을 이해하기에 앞서 그의 삶의 여정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이상배는 십 대 시절 유독 그림을 좋아했다. 전문적으로 미술을 배운 건 아니지만, 언제나 캔버스를 가지고 다니며 주변 풍경을 자기만의 표현법으로 그리거나, 과도를 활용해 나무를 직접 깎아 형태를 만들었다. 매일 책을 읽고,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그림과 조각을 하지 않은 건 이십 대로 접어든 시점으로 한순간에 모든 걸 망각한 사람처럼 미술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이상배는 당시 상황을 “그림 그릴 에너지가 완전히 전소(全燒)했다”라고 설명한다. 그의 이십 대는 ‘시장 바닥의 삶’이었다. 그는 구두닦이, 김밥 장사, 얼음 장사 등 시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았다. 무작정 집을 떠나왔기 때문에 집이 없는 떠돌이들이 모여 사는 허름한 집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십 년을 버텼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살다 간 더는 안 되겠더라고요. 그렇게 힘들게 사니까, 사람이 간사한 게 십 대 시절 그림 그리던 자신이 그리운 거예요. 그래서 다시 집을 찾아갔죠. 그런데 옛날 쓰던 공책, 캔버스, 읽던 책. 과도로 깎아 만든 나무 조각 작품들이 전부 다 그대로 남아 있더라고요. 그 순간이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요.”
이상배는 삼십 대에 조각가가 됐다. 타인이 그를 조각가로 불러 준 건 아니지만, 그는 조각가가 되어 매일 나무 속을 깊이 파거나,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냈다. 초현실주의화가들과 시인, 소설가들이 무의식에서 얻는 창조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자동기술법처럼, 그도 무의식 그대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손으로 표현했다. “자신도 모르게 빚어내고 싶은 형상이 떠오르면 일단 시작해요. 그 기운이 끝날때 까지 계속해서 작업하는 거예요.” 이상배는 무의식에서 보이는 형태를 시각화한다고 하지만, 그의 작업에는 결속이라는 공통 분모가 존재한다. 두 개의 불안전한 덩어리가 맞물려 있는 형태의 조각이 많은 이유는 분명 불안함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희망’을 부여잡고 있던 작가의 모습이 작업에 반영된 것임이 분명하다. 결국, 그는 작업을 통해서 불안을 토해내고, 토해낸 불안을 결속함으로써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다.
이상배는 조각을 통해서 자신이 나아가야 하는 길을 찾았다. “요즘 빠져든 작업은 벽에 거는 작업인데요, 저는 풍경 추상 작업이라고 소개하고 있어요. 풍경 속에는 개도 보이고, 창문도 보이고, 나무도 있어요. 어찌 보면 일상의 풍경을 저라는 사람의 필터로 바라본 그림이라고 봐도 좋을 거 같아요.” 이상배의 조각 작품은 자신의 내면을 응축한 추상 작업이라면, 그의 평면 작업은 자신의 여정을 펼쳐 놓은 삶의 풍경화이다.
“작업을 통해서 비로소 걸을 수 있게 됐습니다. 평면 조각에는 제가 걸으며 보고 느낀 이미지들을 단순한 형태로 표현했어요. 사각형이 많이 보이는데, 그건 모두 방랑객 시절에 본 따뜻해 보이는 집의 창문을 상징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조각할 당시만 해도 집의 창문을 떠올린 건 아니지만, 완성하고 다시 보니 어려웠던 시절에 본 창문이 떠오른 것이죠. 힘들었던 시기이잖아요. 다들 자기만의 방을 갖고 있는데, 제 방은 어디에도 없었죠. 그런 마음들이 삶의 풍경화가 되는 남는 거예요. 그런데 이 풍경이 돌이켜 보니 참 아름답네요. 그렇죠?” 이상배에게 아름다움은 생명이 깃든 것들이다. “살아 있어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잖아요. 꽃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고, 자연도 그렇고, 다 그렇죠. 그러니 제 조각도 아름다워 보이려면, 여전히 제가 생생하게 느끼는 감정들이 담겨 있어야겠지요. 제가 다시 작업을 할 수 있게 만든 건 결국에 고통의 시간이었으니까요.”
갤러리 모순에서 진행하는 이상배의 개인전 <CARVING THE PATH>는 삶을 고군분투한 작가의 여정을 담는다. ‘길을 조각하다’라는 뜻의 전시 제목을 선정한 것 또한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조각작품이 되어 공간에 세워지거나 걸리기 때문이다. “비로소 걷는 것이죠.” 이상배가 인터뷰 중에 가장 많이 언급한 표현이다. 비로소 걷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삶의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고 나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에 가까운 표현일 것이다. 결국에 이번 전시가 담는 건 삶의 여정을 경험한 이가 만든 아름다운 풍경이다.